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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과학자

페르마를 완성시킨 소피 제르맹 Sophie Germain

by Flying_Chase 2021.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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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 제르맹
Sophie Germain
1776-1831

프랑스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숨겨져 있던 천재 수학자"

소피 제르맹은 1776년 4월 1일 프랑스 생드니 가 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부유한 비단상인이었다든지 금세공사였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있다. 어쨌든 당시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것은 확실하다. 아버지 앙브루아즈프랑수아 제르맹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국민의회의 의원으로서 딸 소피 제르맹은 아버지가 정치, 철학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한 번쯤 '페르마'라는 수학자의 이름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페르마는 미적분학에서 이용되는 여러 방법을 창안하는 등 많은 연구 성과를 남겼다. 페르마가 위대한 수학자로 역사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덕분인데 그의 증명에 중요한 기여를 한 수학자가 바로 소피 제르맹이다. 즉, 소피 제르맹이 없었다면 페르마도 이처럼 역사에 남을 수학자로 기억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소피 제르맹의 연구 이후 백 년 여 동안 후대 수학자들은 그녀의 작업을 기초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할 수 있었다. 이런 소피 제르맹은 당대의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에 다른 분야에서 경력을 쌓을 수 없었지만 평생 동안 독자적인 학문 활동을 했다.
그녀는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집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았고 아버지 서재에 있던 책을 읽으면서 독학으로 수학, 과학을 공부했다. 그녀는 가정에서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살았다. 18세기만 하더라도 프랑스에서 여성의 대학입학이 불가했다. 더욱이 소피 제르맹의 부모부터 그가 수학을 공부하려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당시 사회 통념상 수학은 여성이 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 밤이 되면, 부모는 딸이 침실에서 수학 공부하는 것을 막고자 불씨를 끄고 옷가지도 치웠지만, 소피 제르맹은 담요로 몸을 둘둘말고 촛불 하나에 의지해 가며 공부를 계속하였다.'는 대목을 보면 부모님이 너무하다는 생각이, 제르맹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이렇게 공부를 하던 제르맹이 18세가 되던 해인 1794년 에콜 폴리테크니크가(프랑스의 최정상급 이공계열 대학교) 세워진다. 그런데 남학생만 입학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소피 제르맹은 당연히 입학할 수 없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 새로운 교육체계에서는 누구든 강의 노트를 가져와 공부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점을 이용해 그녀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수학 강의 노트를 입수해 홀로 공부했다. 소피 제르맹은 자신의 공부 결과를 당시 대학 교수인 조제프루이 라그랑주에게 '르블랑'이라는 남성 이름으로 송부했다. 라그랑주는 후에 직접 제르맹을 만났고 사회적 통념과 편견을 깨고 그녀가 여성임에도 멘토가 되어주었다. 가우스와의 서신 일화는 꽤나 유명하다. 제르맹은 가우스의 대표적 저작인 <산술 논고>를 읽고 3년간 혼자 공부한 뒤 자신만의 증명을 수립하여 자신의 공부 결과를 '르블랑'이라는 이름으로 독일에 있는 가우스에게 보냈다. 제르맹은 가우스와 서신을 전하며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대해 자신의 작업을 소개하는 등 열띤 토론을 펼쳤다. 제르맹은 후에 가명을 쓴 이유에 대해서 "주변에서 여성 과학자를 비웃는 것이 두려웠다" 고 이야기 했다.

후에 그의 이론에 허점들이 존재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에게 공식적인 교육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녀에게 강의 노트만이 유일한 학습자료였고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가명까지 사용하며 편지를 주고받으며 불태운 열정에 대해 떠올리면 그녀의 능력은 실로 대단하다. 안타까운 것은 소피 제르맹에게 기회가 충분히 주어졌다면 더 큰 획을 그을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의 평론가들 또한 비슷한 의견을 냈다. 소피 제르맹은 수학에 매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체계적인 교육의 부재로 다소 취약한 부분이 있었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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