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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과학자

소피아 코발레브스카야 (Sofia Kovalevskaya)

by Flying_Chase 2021.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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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코발레브스카야
Sofia Kovalevskaya
1850-1891

 

수학자, 물리학자, 시인, 그리고 소설가

 

최초의 러시아 제국 과학협회 회원 

아카데미 데 시앙스 상 수상
1884년 스톡홀름대학의 최초의 여성 수학교수
1951년 소련 우표 인물로 선정

 

유명한 수학자이며 소설가인 소피아 코발레프스키야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소피아 코발레브스카야는 1850년 1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습니다. 소피아와 그의 언니 아뉴따는 당대 러시아 귀족 집안의 자녀답게 외국 가정교사 아래서 유럽의 선진화된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소피아는 어렸을 때부터 수학이 매혹적인 세계라고 생각했으며 여러 친척과 가정교사들에게 자청해서 수학수업을 받았다. 한편 그녀는 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당대의 후진적인 러시아 정치 체제를 비판하던 개혁적인 젊은 세대들은 '허무주의자'라고 불렸으며, 사회으 위험세력으로 간주됐다. 소피아 역시 '허무주의자'로서, 혁명에 대한 애착과 수학연구에 대한 애착은 소피아의 삶에 가장 중요한 구심점 노릇을 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여성이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소피아 코발레브스카야가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진보적 성향을 가진 남성과의 결혼이었다. 소피아는 18세에 고생물학자 블라디미르코발레프스키와 사랑없는 결혼을 했다. 결혼을 공부의 수단으로 선택한 소피아 코발레브스카야는 결혼 후 곧바로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녀는 편미분방정식 이론에 지대한 공로를 남기고 근대 유럽시대에 수학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처음 받은 여성, 과학저널 첫 여성 편집위원이었고 수학교수로 임명된 첫 여성이다. 이렇게 뛰어난 수학자였던 그녀가 왜 굳이 결혼을 통해 유학을 해야만 했을까. 당시 러시아에서는 여성의 대학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고, 대학 입학을 위해서는 러시아가 아닌 다른 나라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에서는 미혼 여성에게는 여권이 발급해 주지 않았다. 소피아와 그의 언니 아뉴따는 계속 공부하기를 원했고, 형식적 결혼으로나마 여권을 발급받아 독일로 공부를 하러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독일에 가서도 소피아 코발레브스카야의 학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는 코발레브스캬야에게 겨우 청강생 자격증만 주었다. 다행히 소피아는 베를린 대학의 유명한 수학교수의 개인강의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어 공부를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이런 소피아의 열정은 소피아의 학문적 후견인을 자청했던 괴팅겐 대학의 수학교수 바이어슈트라스와 그녀에게 스톡홀름 교수직을 마련해주었던 수학자 미탁 레플레르에게서도 발견된다. 

유럽에서 변두리에 속했던 스톡홀름에 자식을 친구에게 맡겨두고 홀로 공부를 온 미망인 소피아에게 보수적인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때나 여성에게는 박사학위를 줄 수 없다고 보수적인 대학이 고집할 때에도 그녀는 연구와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소피아는 편미분방정식, 목성 고리의 모양, 대수함수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 결국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이처럼 뛰어난 수학자인 소피아가 겪어야 했던 차별적인 상황들은 이 외에도 많았다. 그의 전기를 썼던 작가 조차도 소피아의 연구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엄마였던 소피아를 모성애가 부족한 여성임을 굳이 강조하기도 했다.(보통 한 사람의 에세이를 쓰는 작가는 치부라고 생각될 수 있는 부분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도 되었음에도), 후대에도 '위장 결혼까지 불사한 여성'이라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남편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투신한 언니와 형부를 구하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가 구명운동을 펼쳤을 정도로 가족을 사랑하고, 남편 블라디미르가 허황된 꿈에 빠져 사업에 실패한 후 그의 빚을 계속해서 갚으면서 가족을 지킨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는 여러 차별에 굴하지 않고 편미분 방정식 이론에 지대한 공을 세우고 최초의 러시아 제국 과학협회의 회원으로 선출됩니다. 그 외에도 '코시-코발레프스카야' 정리를 통해 미분 방정식 해법에 기여했고, '초타원함수'를 이용해 미분 방정식 체계 통합을 통한 문제 해결, 비대칭 형태의 물체 대부분에 대해 적용할 수 있는 해법 등을 제시했다. 이런 멋진 업적을 기반으로 소피아는 프랑스 파리 아카데미 데 시앙스에서 보르댕상(프랑스 과학 분야 최고상)을 받고,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받았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소피아는 바쁜 와중에도 <행복을 위한 투쟁>이라는 희곡을 쓰며 문학과 수학 양쪽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갑니다. ""내가 수학과 문학을 동시에 하는 이유는 한 쪽에만 매진할 경우 다른 한 쪽이 곧 멀어지기 때문이다. 이 학문은 굉장한 상상력을 요구하며, 당대의 위대한 수학자 중 하나는 시인의 영혼이 없을 경우 우리는 수학자가 될 수 없다는 지당한 말씀을 남기셨다.""며 그녀가 수학과 문학 활동을 같이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수학을 예술로 승화시킨 소피아 코발레프스카야(Sofia Vasilyevna Kovalevskaya). 그녀는 수학 속에서 영혼을 노래한 시인으로 근세 유럽이 배출한 천재 여성 수학자이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그녀에게 ‘영혼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수학자’라는 별칭을 지어 주었다. 소피아 코발레프스카야의 업적을 기리는 움직임은 점차 많아져 독일의 알렉산더 폰 홈볼트 재단에서는 격년으로 소피아 코발레프스카야 상을 젊은 연구자에게 주고, 그의 이름을 따서 달의 분화구 이름을 짓기도 했다.

소피아가 독감이 겹친 폐렴으로 죽음을 며칠 앞둔 시기에 독일의 한 잡지와 인터뷰에서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 “성이나 나이라는 이유 때문에 수학 연구에서 어떤 방해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까?” 코발레프스카야는 또렷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실, 아버지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공부한 여성을 싫어하는 큰 편견이 있었습니다.”

 

시대적 편견과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업적을 이루어낸 멋진 여성 소피아에게 박수를 보낸다.

앞으로도 잘 알려지지 않은 멋진 여성들에 대해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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