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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의 발견 로잘린드 프랭클린 Rosalind Elsie Franklin

by Flying_Chase 2021.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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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잘린드 프랭클린
Rosalind Elsie Franklin
1922-1958(영국 런던 노팅힐 태생)

 

20세기 최고의 업적 DNA
🔬🌡
생물리학

 

 

프랭클린은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유대인 가족에서 태어났다. 프랭클린은 1938년 Cambridge 대학교의 뉴넘 컬리지에 진학해 화학을 공부했습니다.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진 용어 DNA 꼬여있는 이중나선형 구조의 DNA 는 20세기 생물학에서 가장 유명한 업적으로 꼽히기도 하죠. 안타까운 것은 현대 분자생물학의 기반이 되는 이 중요한 발견이 '왓슨과 크릭'이라는 두 학자의 업적으로만 기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 DNA 이중나선 구조 이론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바로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라는 여성 화학자였습니다. 그녀는 DNA의 나선 구조를 실험적으로 처음 입증한 과학자로, DNA 이중 나선의 발견을 이끈 DNA의 X선 회절 사진에 관련된 연구로 가장 유명합니다. 그녀는 철저한 실험에 근거해 심지어 왓슨과 크릭의 초기 모델이 가진 허점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DNA구조는 어떻게 이중 나선형인 것을 알게 되었을까?

DNA1952년 5월에 프랭클린은 X선 결정학을 통해 DNA의 B형에 대한 선명한 사진을 찍는 데 성공하면서 DNA가 나선 구조로 되어 있음을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이렇게 DNA에 대해 프랭클린이 앞선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너무 황당한 사건으로 DNA 연구의 주도권이 왓슨과 크릭 쪽으로 넘어가게되는데 , 이는 프랭클린이 만든 자료가 프랭클린과 같은 학교에서 연구하던 윌킨스라는 친구가 프랭클린의 동의 없이 X선 사진을 왓슨과 크릭에게 보여주게 되면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이 덕분에 왓슨과 크릭은 DNA가 꽈배기처럼 꼬인 모양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왓슨과 크릭은 1953년 4월에 <네이처>지에 프랭클린의 허가없이 프랭클린이 찍은 DNA X선 회절 이미지를 사용하여 DNA의 이중나선 구조에 대한 논문을 게재했고, 노벨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DNA 구조를 발견한 공로는 모두 왓슨과 크릭에게만 돌아갔죠. 프랭클린의 허가 없이 사용 된 DNA의 나선 구조 X선 이미지와 그의 정확한 데이터 해석이 DNA 구조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 과정에서 프랭클린의 과학적 기여는 무시되어 왔습니다. 

DNA구조의 발견을 통해 학자들이 유전 정보가 어떻게 부모에서 자식에게로 전달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랭클린은 여자에게는 학위를 주지 않았던 시절 대학을 다녔고, 여교수에게 식당 출입을 제한하는 시절 대학에서 연구하는 등 여성에게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환경에서 당당하게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윌킨스의 허락없는 자료 공유, 그리고 경쟁적으로 연구를 한 왓슨과 크릭의 욕심으로 그의 기여는 모두 없는 일이 될 뻔 했습니다. 다행히 후대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에 의해 그의 공로가 발견되었고, 영국 정부는 그를 기리기 위해 ‘로잘린드 프랭클린 상’을 제정했습니다. 해마다 우수하고 업적이 탁월한 여성 과학자들에게 로잘린드 프랭클린 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왓슨은 자신의 이중나선 저서에서 프랭클린을 '반항적인 신데델라, 여성적인 매력을 보이는 것을 끔찍하게도 싫어한 여성'등으로 표현하며 프랭클린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프랭클린은 날카로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아주 매력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만일 옷차림에 조금만 신경을 썼어도 아주 멋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 31살의 나이에 영국의 10대 같은 옷차림….""등 외모에 대한 평판과 그의 성격에 대해 깎아내리는 이야기 뿐입니다. 
이후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DNA 연구 대신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로 연구 주제를 바꿔 5년 간 17개의 연구 논문을 출간했고, 세계 최초로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의 가운데 구조가 빈 튜브 모양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프랭클린의 죽음

1956년 미국으로 출장갈 때, 프랭클린은 자신의 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복부 주위에 혹이 생겨 치마를 입기조차 힘들었다. 같은 해 9월 수술을 해보니 복부 주위에 2개의 종양을 발견했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일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가 속한 팀에서 계속 결과를 냈다. 1956년 그녀는 7개의 논문을 발표했다. 1957년도 후반 다시 위독한 상태에 놓은 프랭클린은 왕실 마르스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1958년 1월, 다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던 프랭클린은 생물물리학 연구 경영자로 승진되었으나, 3월 건강이 다시 악화되고 4월16일 난소암으로 결국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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